한국산업안전뉴스

[기자수첩] ‘잡조례비’는 예산 항목이 아니라, 책임 회피의 기술이다

이영진 기자 | 기사입력 2026/01/18 [09:51]

[기자수첩] ‘잡조례비’는 예산 항목이 아니라, 책임 회피의 기술이다

이영진 기자 | 입력 : 2026/01/18 [09:51]

 

[한국산업안전뉴스] 이영진 기자

 

예산서에 등장하는 ‘잡조례비’. 그러나 이 항목은 행정 편의의 산물이기 이전에, 감사와 수사를 피하기 위해 설계된 구조에 가깝다.

 

잡조례비의 가장 큰 문제는 단순한 모호함이 아니다.

 

사용 목적을 특정하지 않아도 집행이 가능하다는 점, 바로 여기에 위험성이 있다. 이는 곧 “누가, 왜, 무엇을 위해 썼는지”를 사전에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수사 관점에서 보면 명백하다.

 

예산 집행에서 목적·대상·근거가 불명확한 항목은, 횡령·배임·부당집행의 통로로 기능해 왔다. 실제로 다수의 지방자치단체 감사 보고서에서 잡조례비는 반복적으로 “집행 근거 미흡”, “부적정 사용”, “증빙 불충분”이라는 동일한 문구로 지적돼 왔다.

 

이쯤 되면 단순 실무상 편의로 보기 어렵다.

 

잡조례비는 통제받지 않는 예산, 다시 말해 감사의 사각지대다. 감사 관점에서도 문제는 구조적이다.

 

통상 예산은 ‘목적 → 항목 → 세부 집행 기준’이라는 단계적 통제를 거친다. 그러나 잡조례비는 이 구조를 통째로 건너뛴다. 결과적으로 사후 감사에서 문제를 발견하더라도, 담당자는 늘 같은 답변을 내놓는다.

 

“관행이었다.”

“조례에 명시돼 있다.”

“소액이라 문제 삼기 어렵다.”

 

그러나 수사에서 ‘관행’은 면책 사유가 아니다.

 

조례에 있다는 사실 역시, 그 조례 자체가 위법·부당하다면 면죄부가 될 수 없다. 더욱이 ‘소액’이라는 이유로 반복 집행될 경우, 이는 오히려 상습성과 고의성을 강화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더 심각한 것은 책임 소재의 실종이다.

 

잡조례비는 결재 라인을 분산시키고, 집행 책임을 흐린다. 예산을 편성한 부서, 집행한 부서, 승인한 책임자 누구도 명확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는 행정의 실패가 아니라, 책임 회피가 제도화된 결과다.

 

묻지 않을 수 없다. 왜 굳이 이렇게 애매한 항목을 유지하는가. 왜 다른 예산은 세분화하면서, 이 항목만큼은 손대지 않는가. 수사기관의 시선에서 보면 답은 단순하다.

 

설명하기 어려운 돈은,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구조 속에 숨겨진다. 예산은 집행의 문제가 아니라, 의도의 문제다. 존재하는 한, 행정은 언제든지 “몰랐다”, “규정상 가능했다”는 말 뒤로 숨을 수 있다.

 

감사는 숫자를 보지만, 수사는 구조를 본다. 그리고 이 구조는 분명히 말해준다. ‘잡조례비’는 단순한 예산 항목이 아니라, 책임을 희석시키기 위해 설계된 회색지대다.


kisnews0320@naver.com 

이영진 기자
kisnews0320@naver.com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