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산업안전뉴스 박혜숙 기자] 서울역사편찬원은 석문(石文)을 통해 서울의 역사를 풀어낸 서울역사강좌 제17권 '돌에 새긴 서울史'를 발간했다. '돌에 새긴 서울史'는 서울에 남아 있는 석문을 집중 조명하여 수천 년 동안 중심지 역할을 해온 서울의 역사를 깊이 이해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석문에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담았으며 고지도, 화첩, 사진 등 시각 자료를 풍부히 수록하여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인류는 돌, 나무, 금속 등에 글자를 새기는 각자(刻字) 행위를 통해서 삶의 자취와 소망 등을 남기고자 했다. 특히 비석과 바위 등 돌에 글을 새긴 것을 ‘석문’이라 한다. 특히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부터 ·한양도성 각자성석 ·사산금표와 부석금표 ·북한산·도봉산 일대 석각 ·이윤탁 한글 영비 ·증주벽립 ·삼전도비 ·인왕산 백제청풍 ·공덕리 금표 ·한양공원비 등 석문 10곳의 역사 이야기를 담았다. 대부분의 석문은 역사적 인물의 위업과 바람, 그 시대의 사회상이나 인물 개인의 사상 등이 담겨있다.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는 한강 유역을 신라의 영역으로 삼은 진흥왕의 업적을 영원히 전하고자 한 기념비다. 이윤탁 한글 영비는 조선 전기 문신 이문건이 아버지 이윤탁의 묘를 어머니의 묘와 합장하면서 세운 묘비다. 이 묘비의 서쪽 면에는 당시 한자를 읽지 못하는 일반 백성을 위해 무덤과 비석의 훼손을 경계하는 글을 한글로 새겨 넣었다. 16세기 우리말 쓰임의 실체를 알리는 귀한 증거이다. ‘증주벽립(曾朱壁立)’은 종로구 명륜1가 주택가 한복판에 다소 생뚱맞은 모습으로 바위에 새겨진 석문이다. 이는 ‘우암 송시열’의 글씨로 전란의 모진 위기 속에서도 조선왕조가 중화문명의 유일한 계승자라는 ‘조선중화주의’ 이념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공덕리 금표’는 1870년 흥선대원군이 세운 표석이다. ‘120 걸음 안에 토지 이용을 금지한다’는 위세 당당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토록 당당했던 흥선대원군은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등의 사건을 거치며 권력에서 완전히 배제, 아소당에서 자조(自嘲)의 글을 남기며 쓸쓸히 생을 마감한다. ‘공덕리 금표’는 권력의 무상함을 우리에게 전하듯 공덕역 앞 빌딩 숲 사이에 조촐히 서 있다. 수백 년 동안 서울의 울타리가 되어 준 도성과 도성 안팎의 산림을 지키기 위한 책임행정의 흔적 역시 서울 속 석문에 남아있다. 한양도성 곳곳에는 글자를 새긴 성돌, 즉 각자성석(刻字城石)이 곳곳에 남아있다. 각자성석은 도성의 축조와 관리 양상과 더불어 조선의 엄밀한 기록문화와 엄정한 책임행정의 일단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조선시대에는 입산금지구역을 지정하여 도성 안팎의 산림을 보호하고자 했다. 이러한 산림 보호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흔적이 바로 사산금표와 부석금표이다. 특히 북한산 일대에는 왕릉 채석장에서 일반의 채석을 금하는 내용을 담은 부석금표가 아직도 다수 남아있다. 치욕의 순간을 끊임없이 되새김질하게 하는 석문 역시 서울에 자리하고 있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궤구고두’를 행하면서 항복하는 치욕을 겪었다. 바로 그 장소에 청의 요구로 청 태종의 공덕을 기리는 내용의 삼전도비를 세우게 됐다. 그 비석이 아직도 석촌호수 인근에 외롭게 서 있다. 남산 케이블카 승강장에는 커다란 비석 하나가 남아있다. 앞면에 새겨진 한양공원(漢陽公園)이라는 글씨를 따서, ‘한양공원비’라고 불리는 비석이다. 앞면의 글씨는 고종의 친필로 전해진다. 한양공원은 개항기 조선으로 이주한 일본인들을 위해 만들어진 위락시설로 당초에는 한일 공동 공원이라는 취지로 설립됐으나 결국 일본 거류민단의 소유가 되어버렸다. 조선시대 한양에 꽃피웠던 선비문화의 흔적 역시 서울에 남겨진 석문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도봉산 계곡 곳곳에는 이은, 조현명 등 조선시대 선비들이 남긴 바위 글씨가 새겨져 있다. 글자 수로 따지면 얼마 되지 않는 바위 글씨이지만, 도성 외곽 왕실의 토지가 세대를 내려오며 재분배된 과정과 18세기 소론 탕평파의 교류에 얽힌 내력 그리고 도봉산에 꽃피웠던 구곡문화의 흔적 등 지난 역사의 마디마디를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19세기 세도 가문으로 유명한 안동 김씨 가문이 오랫동안 살았던 청풍계는 인왕산 골짝 중에서도 경치가 빼어난 곳으로 유명하다. 도시화 과정에서 청풍계의 아름다운 풍경은 사라졌지만, 영원토록 변치 않는 깨끗하고 곧은 지조를 다짐하기 위해 새긴 백세청풍 바위 글씨만은 여전히 홀로 남아있다. 이 책은 서울역사편찬원에서 운영하는 2024년 상반기 서울역사강좌 교재로도 사용된다. 이상배 서울역사편찬원장은 “서울에 남겨진 석문의 조성 시기와 배경 등은 제각각이지만 글자 하나하나에 담긴 뜻이 영원토록 전해지기를 소망한 바는 똑같다.”며 “이 책을 읽는 여러분 모두가 ‘각자’의 매력을 마음속에 새길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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